'조난 객이 되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는 것 같아도 원점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이다.

조난객이 되는 것은 춤추듯 겹쳐지는 원들 사이에 붙들리는 것이다......

고요한 받 한가운데서 누군가 당신처럼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그 사람도 점에 갇혀서, 두려움과 분노 , 광기, 무력감, 냉담으로 발버둥치고 있을까'

(소설 파이 이야기 중에서)

 

<파이 이야기>로 부커상을 받으며 단번에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한 얀 마텔의 소설이 <라이프 오브 파이>로 영화화되었다.

중국 출신으로 이제는 헐리우드에서 독자적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는 이안 감독의 작품답게 <파이 이야기>는 이안 버전 <라이프 오브 파이>로 색다른 방점을 찍고 우리에게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소년은 가족 모두와 떠난 항해에서 가족 모두를 잃은 채 오직 맹수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함께 조난을 당한다. 철모르는 어린 시절 아버지 덕분에 일찌기 깨닫게 된, 아니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단숨에 소년 조차 배 밖으로 밀어내버리는 리차드 파커의 맹수성으로 인해 조난이나 가족을 잃은 슬픔에 잠길 사이도 없이 생존의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절박한 위기 상황은 역으로 망망한 태평양에서 소년을 구하는 계기로 자리매김한다. 마지막 항해가 끝나고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숲으로 사라지는 리차즈 파커가 섭섭해 눈물을 터뜨릴 만큼.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고난을 딛고 살아나서가 아니었다. ........

내가 흐느낀 것은 리파가 아무 인사도 없이 날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서투른 작별을 하는 것은 얼마나 끔직한 일인가......그래야만 놓아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꼭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남기게 되고 , 후회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리처드 파커, 다 끝났다. 우린 살아남았어. 믿을 수 있니? 네게 도저히 말로 표현 못할 신세를 졌구나. 네가 없었으면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정식으로 인사하고 싶다. 고맙다......"'(소설 <파이 이야기> 중에서)

 

이안 감독 버전 영화에서나, 얀 마텔의 소설에서나, 삶은 언제나 예측 불허이다. 아이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항해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고, 겨우 함께 한 것은 맹수이되, 그 맹수로 인해 또 목숨을 구한다.

영화는 소설 속 그저 막막하고 거침없기만 했던 태평양을 3D의 화련한 볼거리를 통해, 거칠지만 우주 만물의 영롱한 자연의 신비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소년 파이의 신에 대한 예찬이 뜬금없다 느낄 수 없을 만큼.

그러나 영화 전편을 통해 리차드 파커라는 맹수를 조련해 가는 소년 파이의 고군분투를 보노라면, 인도어로 비속어가 되는 자신의 이름을 멋들어지게 '파이'로 거듭나게 했던 소년의 영특한 판단 에피소드처럼, 결국은 태평양에서 소년을 구한 것은 일찌기 아버지가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가르쳐 준 '이성'이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더구나, 영화의 마지막 조난 후 소년에게서 각색되어진 사실들(?), 함께 조난당한 어머니와 사람들을 조리장이 생존을 위해 난폭하게 희생시키고, 다시 그를 소년이 죽였다는 이야기는 문득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영화의 진실성 여부에 큰 혼란을 느끼며, 내가 본 것과 내가 믿어야 할 것, 믿고 싶은 것에 대한 강한 물음표로 영화는 우리를 이끌어 간다.

즉,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가 믿고자 하는 것이 과연 정말 존재하는 것이냐, 혹은 그저 우리가 우리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만들어 낸 것은 아닌가 라는, 종교의 존재론적 고민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버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안 감독 버전, <라이프 오브 파이>는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는, 그래서 결국은 그 어느 종교도 인간에 의한 것이라는 영화 서두의 암묵적 의미처럼, 인간에 의한 종교라는 엄밀하게 평가하자면 '무신론적 잔향'를 짙게 드리우며 끝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이안 감독의 버전보다는 보다 종교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얀 마텔이 말하는 바의 종교는, 우리가 세속적으로 믿는 종교라기 보다는 철학적인 측면에 가깝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종교, 혹은 신이란 내 편이란 의미가 강한 반면에, 얀 마텔이 말하는 바의 종교는 힌두의 신으로서, 우주 만물에 드리운 종교적 신성을 의미하는 바가 더 크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 광폭한 리차드 파커는 우리에게 신성의 발현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적'이나 '혼돈'일 뿐이지만, 얀 마텔이 말하는 종교에 있어서는 그 조차도 또 다른 형태의 신인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익 힘든, 힌두교의 다양한 신들, 때론 악마의 모습으로, 때론 동물의 형태로, 혹은 그 무엇으로 발현되지 않은 아우라로 현현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인간의 능력 이외의 신비로운 '신성'으로 작가는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살아야 하는 의지를 잃은 소년 파이가, 리차드 파커를 동료로 받아들이고, 태평양이라는 삶의 조건을 기반으로 삶의 파행을 극복해 냈을 때, 신을 예찬하는 상황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적 삶의 구복으로서의 '신'을 갈구하는 우리가 봤을 때는, 그저 그건 삶의 성실성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작가는 늘 작품을 통해, 인간이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묻곤 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을 보면, 어린 나이에 에이즈에 걸린 소년이라던가, 음악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청소부인 것처럼 현실에서 탈출구를 꿈꾸기 힘든 상황 속에 주인공들을 자리매김한다. 거기에 비하면 호랑이와 태평양을 건너는 소년은 그 중 나은 편이다 싶게.

그리고 그의 주인공들은 그것이 '이성'이든, '신성'이든 그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그 예전의 철학자들처럼, 주어진 삶의 고해 속을 묵묵히 버텨간다. 열 아홉 에이즈 소년은 남은 기간 동안 미지의 헬싱키의 로카마티오 일가의 내력을 써내려 가고, 청소부는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지도 않을 지도 모를 음악을 계속 만든다. 망망대해 태평양을 리차드 파커를 조련하며 조난하는 파이처럼.

 

<파이 이야기>가 영화화 된다고 했을 때 저 피상적인 스토리가 이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졌었는데, 지구라는 고해에서 조난당한 이 시대의 수많은 파이들은, 얀 마텔의, 혹은 이안 감독의 메시지를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공감했겠구나 싶은 게 아마도 <라이프 오브 파이>의 성공 비결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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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 1. 26. 1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