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속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한국인들의 다양한 음식 문화를 보여주고 있는 <한국인의 밥상>은 방송가의 오랜 스테디셀러 프로그램이다. '어르신' 최불암 배우의 인자한 아버지같은 해설에 곁들여진 <한국인의 밥상>은 2011년이래 400회를 넘기며 전국방방곡곡의 밥상과 이야기를 찾아간다. 그리고 74주년 광복절을 맞이한 <한국인의 밥상>은 특별 기획으로 의병들의, 감옥에서 생을 다한 독립운동가의, 광복군의 밥상을 따라 독립운동의 족적을 밟아본다.

척박한 땅에 피어나는 메밀보다도 더 척박한 삶을 이겨낸 의병들의 삶이 깃든 밥상,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이국의 교도소에서 고향을, 어머님을 그리워했던 젊은 독립운동가가 받아고팠던 밥상, 그리고 이국의 땅에서 나라잃은 나그네였지만 독립을 향한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광복군의 밥상까지 그저 한 끼의 밥상이 아니라, 그 밥상이 곧 독립운동사의 숨겨졌던 한 장이 된다. 

 

   

 

의병들의 호구지책, 막국수
그 시작은 춘천시 남면이다. 고흥 유씨 집성촌인 이곳에 한여름 볕을 맞으며 옥수수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옥수수 농사를 지으시는 박순재 씨는 알알이 잘 여문 옥수수를 내보이며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옥수수일 꺼라며 자랑을 한다. 하지만 이 옥수수는 그저 여름철 심심풀이 간식 옥수수가 아니다. 

이곳 남면은 19세기말 나라의 국운이 경각에 달했을 때 춘천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박순재씨 댁 어르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병 어르신들이 싸우면서 드시던 <칡잎 옥수수 반대기>를 재현해 본다. 쌀이 귀하던 시절 알알이 떼어낸 옥수수를 절구에 찧어 소금간만을 해서 여름산 지천에 널린 칡잎에 싸서 쪄낸 음식, 지금의 입맛에야 배가 고파야 먹을만한 옛날 맛, 하지만 그 시절 의병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한 끼였다. 

막국수는 어떨까? 국수를 뽑는 틀도 없던 시절, 반죽을 해서 칼로 뚝뚝 잘라 칼싹두기라 이름을 붙였던 메밀 국수,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의병들은 산골로 몸을 피했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을 심었다. 봄부터 서리올 때가지 타작만 해서 바로 갈아서 먹을 수 있는 메밀을 요즘처럼 따로 양념이 없이 심심한 동치미 국물에 말아 투박한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그 메밀 칼싹두기를 팔기도 했다는데, <춘천 백년사>는 바로 의병들이 만들어 팔던 메밀칼싹두기가 오늘날 춘천의 대표 음식인 '막국수'의 유래라 기록하고 있다. 

의병의 고장, 의병장만 열 댓분이나 되는 이곳에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는 독보적이다.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어, 의병하러 가세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 소냐, 
우리 안사람 만만세, 만세로다


1907년 여성 의병대를 조직, 군자금을 모아 의병을 지원하는 하고 의병가, 안사람 의병가를 만들어 독려하고, '왜놈대장 보거라'는 경고문을 4차례나 쓰셨던 분, 국권이 침탈되자 온가족이 만주로 가 돌아가실 때까지 독립 운동에 헌신하셨던 윤의사는 잘 사는 집에서 쌀을 받아다 나눠 먹이곤 하셨단다. 하지만 쌀이 귀하던 시절에는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이 주식, 그 중에서도 보리쌀은 밥을 하면 6배나 늘어나는 의병들의 생명줄과도 같은 음식이었다고 한다.  먼길 떠나는 의병들을 위해 보리쌀로 주먹밥을 만들어 호박잎에 싸서 보내셨다고 한다. 

 

   

 

숟가락이 여럿 꽂힌 돌솥 
백정기 의사는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삼의사로 꼽히는 독립운동가이다.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3.1운동에 참가한 후 중국으로 망명, 주중일 공사 유길명을 암살하려다 밀고로 잡혀 무기 징역을 받고 복역하던 백의사는 39의 나이에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사하셨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로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셨던 백의사는 뜻한 바 의거도 이루지도 못하셔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한다. 

그의 며느리 양순애 씨, 서른 아홉의 뜻을 이루지 못한 청년의 얼굴로 남아있는 시아버지가 애처롭다. 하지만 이 집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사연은 곡진하다.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결혼은 했지만, 일찌기 독립운동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백정기 의사, 형님의 뒤를 이어 역시나 독립 운동의 길에 나섰던 백용기 의사에게 어서 빨리 아들을 낳아 홀로 남은 어머님을 기쁘게 해달리 부탁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가는 길이었지만 어머님께는 죽어서도 씻지 못할 큰 불효를 저질렀다며 안타까워하셨다는 백의사, 동생은 아들을 낳아 형님의 소원을 풀어드렸고, 양순애 씨는 덕분에 두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단다. 

감옥에 계신 백의사를 면회하러 갈 때면 빠지지 않았던 콩나무 잡채는 전북 지방의 대표적인 잔치 음식이다. 일반적인 콩나물 무침과 달리, 갖은 채소를 채 썰어 넣고 겨자 소스로 맛을 낸 음식, 고향집 담벼락에 많이 나던 머위에 들깨를 넣어 끓인머위탕에, 고기를 좋아하셨던 하지만 마음놓고 먹어보시지도 못한 백의사를 떠올리며 끓인 우족탕까지 푸심한 한 상이 백의사의 영전에 바쳐진다. 다른 제삿상과 달리 한 솥 그득하게 지어진 솥밥, 늘 동지들을 챙기셨던 백의사가 동지들과 넉넉히 드시라고 수저가 여러 개 꽂힌다. 

 

   

 

광복군들의 전투식량 오리알, 닭내장은 총손질로 
전직 음악 교사인 김일진씨는 오늘도 어머님을 떠올리며 아내와 함께 직접 손맛이 좋으시던 어머님이 하셨던 그 시절의 음식을 재현해 본다. 

김일진씨의 아버지인 김학균씨는 1929년 조선 혁명군을 시작으로하여 1940년 한국 광복군 제 3지대장, 그리고 어머님  오광심 여사 역시 1935 민족 혁명당에서 부터 한국 광복군 선전 활동까지 부부가 해방 전까지 독립에 헌신해오셨던 분들이셨다. 해방후 고국으로 돌아오셨지만 고국의 삶 역시 녹록한 것이 아니라 삯바느질로 근근히 생계를 꾸려가셔야만 하셨다고 한다. 

부모님을 따라 중국의 각지를 떠돌며 생활했던 김일진씨에게 어머니 오광심 여사는 음식 솜씨가 좋아 동지들에게 '나의 어머니' 같다며 칭송을 받던 분이셨다. 생활했던 지역이 중국이었던 만큼, 김일진씨가 기억하는 음식 역시 그곳의 영향이 크다. 

전투식량이었던 오리알, 볶음 소금물에 10~15일을 숙성시킨 오리알, 숙성시킬 수록 투명해진 껍질째 삶아 반으로 잘라 파먹는 짭조름한 오리알 하나면 흰 죽 한 그릇은 뚝딱 해치울만한 밥도둑이었단다. 배급된 밀가루에 설탕, 소금 등을 넣어 발효시켜 쪄낸 '소빵', 당시만 해도 겉껍질만 벗겨 거칠고 누런 밀가루 빵이 싫어 고명으로 얹은 대추만  집어먹다 혼이 났었다지만 이제는 한 사람이라도 배부르게 먹이기 위해 유독 커다랗게 빚었던 어머님의 소빵은 잊을 수 없는 김일진씨의 소울푸드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웠다던 닭, 그 마저도 승전 등 좋은 일이 있어야 먹을 수 있었던 닭은 고기를 삶고 내장은 총 손질을 하는 등 어느 부위 하나 버릴 게 없는 소중한 음식이었다. 한 끼, 한 끼를 떼우는게 큰 일이었던 팍팍한 독립군의 살림, 그래도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장개석이 독립 운동 세력을 인정하고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돼지 고기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데, 돼지 고기를 충분히 볶아 죽순 등 야채를 넣어 만든 돼지고기 죽순 볶음은 그 시절의 '호사'였다고 기억된다. 김치는 언감생심, 중국인들이 버리 샐러리 겉껍질을 소금에 절여 만든 친차이 무침 정도면 김치가 없어도 견딜만 했던 시절이라 김일진씨는 회고한다. 



by meditator 2019. 8. 16. 2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