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영화를 개봉한 줄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르는, 늘 그래왔지만, 점점 더 모르게 되는 홍상수의 신작 영화 <풀잎들>이 10월 25일 개봉했다. 

 

 

잔잔한 바람에도 열심히 흔들리는 카페 앞 고무 대야 안의 풀잎들, 그렇게 시작되는 영화는 대번에 시를 기억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김수영의 <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골목 안 커피집이 있을 것같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커피집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그 근처 식당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우는 풀, 풀잎들 딱이다. 

홍상수도 늙고, 그의 페르소나도 늙고- 단풍
한참 때 통영에서 날리던 노배우(기주봉 분)는 이제 함께 극단을 하던 대표와도 틀어지고, 한 채 있던 집마저 팔아 써버리고 여자 후배에게 방 한 칸을 적선하는 처지이다. 말로는 월세는 내겠다지만 어째 그 말조차 미덥지 않다. 한때는 흠모했을 지 존경했을 지 모를 선배 앞에서 원칙이라 어쩔 수 없다며 나즈막하면서도 완강하게 거절하는 후배, 
그리고 역시나 후배인 듯한 소설가에게 함께 제주도에 내려가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청을 넣는 한때는 연극인이었으나 이젠 글을 쓰겠다는 늙수구레한 남자(정진영 분)의 추파인지 청탁인지 모를 말 역시. 글은 혼자 쓰는 거라는 거절에 부딪친다. 

 

 

유지태였고, 김태우였고, 유준상이었으며, 이선균이었던 홍상수의 페르소나들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이제 기주봉이고, 정진영이 되었다.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해보려는 그 예의 습관성 바람은 방식과 방법은 달라졌어도 여전히 그 본성을 놓치지 않는 듯 보이지만, 한때는 잘 나가는 대학 교수였고, 영화 감독이던 그들은 어느덧 현업에서 밀려나고 멀어진 본의아닌 '은퇴자'들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북촌인지 서촌인지, 늘 홍상수의 영화 속에서 배경이 되던 여전히 한옥이 배경이 되는 그곳은 <풀잎들>에서도 여전하다. 오가던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는 인연으로 혹은 한 술집에서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합석을 하고, 술을 나누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방식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때는 그 밤새도록 '연애'를 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며 공회전을 해도 언젠가는 돌아갈 '현장'이 있던 그들과 달리, 이젠 굳이 불러주는 곳이 없는 감독의 페르소나들 때문일까, 어쩐지 동네조차도 삶의 현장에서 멀어진 '노인정'같다. 그 사이에서 미래를 기약하며 한복을 빌려입고 사진을 찍으며 낭랑하게 웃는 젊음들이 불협화음처럼.

그건 비단 홍 감독이 나이가 들어서, 그의 페르소나들이 나이가 든 사람들이어서만은 아니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기세 좋게 청룡 영화상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고, 이어 1998년 < 강원도의 힘>으로 감독상을 거머쥐며 90년대 문화의 대표 주자로 등장했을 그 시절, 홍상수라는 사람의 화법이 통하던 그 시절은 그 '바람'같은, 표리부동한 비도덕적인 인간들이나마 그래도 세상에 발 디밀어 살아갈 여지가 있던 시절이다. 그들이 밤 새워 논하고 어울리던 그 허황되고 공허하던 문화라던가, 인간이라던가, 사랑이던가 하는 것들이 그래도 감독의 비아냥을 받으며 삶의 한 자리로 '포용'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십여년, 그 바람같던 주인공이 되어버린 감독 자신이 영화 개봉 소식조차 세상에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개인적 사정은 그렇다치고, 거기에 더해 어쩌면 그보다 더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해왔던 것들이 '자본'의 세계가 되어버린 영화, 혹은 문화라는 이름의 '상품'의 세계에서 '별책 부록'은 커녕, '잡담꺼리'조차 되어지지 않는 처지 때문일까, 그 어느 때보다 <풀잎들>의 공간은 '멈춰진 세상', 혹은 '방기된 세상'처럼 '무위'롭다. 그런데 그 '무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하게 전해진다. 

 

 

그리고, 그럼에도 아직 살아가야 할 풀잎들 
그렇게 여전히 살던 근거지 통영을 떠나 서울 하늘 아래 한 몸 뉘일 곳을 찾으며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 한다던가, 무기력한 삶에 여자와 글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다던가 하는 풀잎이고 싶지만 어느덧 삶의 잎사귀가 말라가는 '단풍'들의 맞은 편에, 진짜 풀잎들이 있다. 

통영에서 온 노년의 배우와 후배의 대화를, 그리고 까페 밖에서의 글 좀 써보겠다는 한때 연극 배우 선후배를 대놓고 엿듯던 여성(김민희 분), 한때 연극배우인 신참 작가의 같이 제주도에 내려가 펜션을 빌려 글을 함께 쓰자는 노골적인 추파인지, 모호한 수작에 대번에 거절을 하고 애인인 듯한 남자를 따라 나선다. 

하지만 그녀가 따라나선 것은 남동생(신석호 분), 한 식당에서 남동생과 미래를 함께 하고 싶은 여성(한재이 분)과 상견례 아닌 상견레로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런데, 미래의 동생댁이 될 지도 모를 그녀에게 대놓고 남동생을 믿냐, 사랑을 믿냐며 어깃장을 놓는다. 

그런가 하면 그런 그녀의 뒤편에서는 얼마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여성(이유영 분)이 그 사랑하는 이의 동료로 부터 애도와 추궁을 오가는 수모를 겪는다. 그녀를 폄하하는 그 남자 앞에서 하염없이 울며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여성은 영화 속을 떠나, 실제로 홍상수의 영화 중 유일하게 해피엔딩이었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을 통해 만났던 김주혁과 이유영의 사랑을 '배려'해주는 자리와도 같았다. 저 세상으로 흩어져 버린 사랑, 떠나간 사람의 존재가 커서, 떠나보낸 사람은 설 자리조차 없는 세상에, 감독은 사랑했던 이들을 위한 '추모'의 한 씬을 보탠다. 

 

 

그리고 해가 저물어 다시 돌아온 까페, 역시나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두 남녀(안재홍, 공민정 분)가 그 절박한 감정을 지나 연민으로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을 조롱하고 엿듣기만 하던 여성은 커피 한 잔을 넘어 숨겨온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하는  '단풍'들과 그 후배들의 자리에 합석한다. 결국 우리 옛말처럼 간 사람은 간 거고, 삶은 여전히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엿듣던 여성이 결국은 죽을 것이라고 비아냥대도, 살아가는 이들은 여전히 그 삶의, 인연의 끈을 이어가게 마련이다. 여전히 까페 앞엔 풀잎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따지고 보면, 단풍이래도, 내일 떨어진다 해도, 풀잎은 풀잎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어느덧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90년대의 파릇파릇하던 풀잎이 이제 단풍이 되어가도록 묵묵히 그 세대를 끈질기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사실화처럼 나이가 들어도 제 버릇 개 못주는, 그런데 심지어 이제는 삶의 굴레에서조차 밀려나버린 그 세대를 그대로 그려낸다. 그리고 때로는 얽히고, 때로는 엇갈리며 아직은 눕기에 이른 젊은 풀잎들 또한  놓치지 않는다. 김수영이 그렸던, 아니 '역사 속 민초'라 해석됐던 그의 시 속 풀잎은 아니지만, 여기 또 바람에 연신 나부대는 풀잎들이 있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만화경이다. 



by meditator 2018. 11. 12. 0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