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광복절 ebs의 다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했다. 그 문을 연 건 시간을 거슬러 1920년대의 중국 길림성 봉오동이다. 일제 하 독립군을 길러내는 독립군 기지하면, 이회영의 신흥 무관학교가 자리했던 서간도, 러시아 연해주의 최재형이 중심이 된 지역이 대표적으로 꼽아진다. 이에 ebs는 한,중, 일, 러 4개국 취재를 통해,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를 가능케 했던 봉오동 신한촌에 자리잡았던 봉오동 독립군 기지를 방송 최초로 공개한다. 또한, 이 독립군 기지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간도 제 1 거부라 불리웠던 최진동, 최운산, 최치홍 삼 형제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소개한다. 






간도 최씨 삼형제의 바톤을 이어 받은 건,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동원 등 숨기고 싶은 일제의 만행을 평생에 걸쳐 집요하게 취재한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일대기이다. (일본의 역사적 만행과 치부 드러낸 일본인, 그가 남긴 한마디 [TV리뷰] < EBS 광복절 특집다큐 > 하야시 에이다이의 끝나지 않은 기록, 김진수)

그리고 광복절 당일, ebs 광복절 특집은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3.1운동 100주년을 향한 거대한 여정 <역사의 빛 청년>, 그 첫 발을 <하와이 애국단을 찾아서>로 내딛는다. 1년 여의 여정을 이끈 이는 다름 아닌, 꽃할배로 돌아온 이순재 선생이다. 광복을 맞이하던 해 12살,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던 광경을 기억하던 아이는 이제 8순의 노인이 되어 역사의 빛이 되었던 청년들의 역사를 설파한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마련한 하와이 노동자들의 피땀어린 돈 
그렇게 이순재 선생과 함께 떠난 하와이, 그곳은 서핑과 아름다운 자연의 휴양지가 아니라, 사람 키보다 굵고 거친 사탕수수만이 빼곡이 차라던 고난의 역사가 서려진 땅이다.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국인이 처음 하와이 호눌룰루에 도착했다. 고국을 떠난지 한 달, 저 마다의 사연이야 있겠지만, 결국 저물어 가는 조선이 그 막막한 태평양을 넘어 자신의 신민을 이 낯선 이방의 땅으로 몰았다. 새벽 4시 반에서부터 꼬박 12시간, 그렇게 하루 70센트를 받으며 보낸 노동의 시간, 그리고 당연히 피부 색이 다른 이들에게 돌아온 편견, 차별, 그리고 고난, 그렇게 호눌룰루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30 여곳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을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먹고 살아가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버거웠을 것이 분명했을 사람들, 그런데 그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그 먼 곳으로까지 보내버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허리춤을 더 졸라맸다. '하와이 애국단', 이 바로 그들이다. 이순재 선생과 취재진은 1923년 결성되어 독립 운동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표였던 임성우 선생, 현도명 선생 외에 훈장은 커녕 조명된 적이 없는 애국단의 나머지 단원들의 행적을 밝히고자 하와이로 떠났다. 

오하우섬 와이우아 올리브 거리 1907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하와이에 이민온 동포들은 39개의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 중 올리브 연합 교회에 이민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이순재 선생과 동갑인 김창완 노목사는 자식들이 팔고 떠난 집의 쓰레기 더미를 뒤져 이민의 기록을 모았다. 그리고 그 누렇게 낡은 기록들 속에, 숨겨진 역사, 비밀 단체였던 하와이 애국단의 은밀한 도모의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그렇게 낡은 영수증과 종이 쪽지 갈피에서 찾아낸 기록에 증거를 더한 건, 한국 독립 운동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이다. 상해의 임시 정부, 하지만 말이 '정부'지 독립을 위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처지를 김구 선생은 '거지 소굴'이라 표현한다. 쓰레기 통을 뒤져  배추 뿌리로 연명하는 처지, 김구 선생은 독립 운동은 커녕, 생존조차 위협받는 처지에 해외 동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임성우 선생 등이 편지를 보낸다.  '생색낼 일을 하고 싶은데 자금이 필요하다면 주선하겠다'는 반가운 답신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하와이 동포들의 독립 자금, 여전히 행색은 거지꼴이었지만, 이 해외 동포의 자금은 생존에 급급했던 임시 정부의 전술적 변화, 그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일본의 만주 침략이 노골화되던 시기, 하와이로부터 온 1000 달러, 그 돈으로 임정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쾌거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준비한다. 폭탄이 되고, 의거의 준비 자금이 된 이 1000 달러는 어떻게 마련된 돈이었을까?

당시 하와이 교포들의 생활은 먹고 살기도 빠듯한 생활이었다, 김창완 노목사가 찾아낸 대한 독립 의연금 영수증에 써있는 금액 10원, 그 돈은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의 한 달 월급 15달러의 반 이상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노목사는 감탄한다. '이 돈을 보내고 그 분들은 뭘 먹고 살았나'라고. 현도명 선생의 막내 딸은 기억한다. 어머님이 가족들도 좀 생각하라고 아버지한테 내던 짜증섞인 하소연을. 

하지만 그렇게 먹을 것조차 아껴가며 모은 돈을 고국으로 보낸 동포들의 이름이나 존재를 찾을 길이 없다. 현도명 선생의 막내 따님의 기억을 쫓아 찾아낸 한 분, 영호 아버지, 그 분을 다큐 제작진은 김예준씨라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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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했던 아버지의 숨겨진 역사, 
혹시나 해서 찾아낸 김예준 씨의 아들 영호 씨, 하지만 아들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미군 기지 세탁소 일을 하셨던 김예준 씨, 엄격하고, 인색하기 이를 데 없었던 분, 침대 메트리스 밑에 돈을 모으셨지만 자식들은 어려서 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게 만들었던 분, 그래서 돌아가신 후 무덤조차 찾게 되지 않았던 냉정한 기억만 남긴 아버지. 

하지만 그렇게 자식에게 기억된 아버지는 사실 한인 애국단에서 독립 운동 자금을 관리하셨던 분이었다. 자식들을 어린 나이에 돈을 벌게 만들면서도 침대 메트리스 밑에 숨겨두었던 그 돈은 바다를 건너 임정의 독립 운동 자금이 되었다.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늙은 아들은 뒤늦게 아버지의 숨겨진 역사를 알고 헤매어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후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비록 늦은 소식이지만 자식들에게 전하며, 그저 인색한 아버지가 아닌 자랑스러운 독립 운동가 아버지를 기린다. 

그런데 왜 당시 하와이의 독립 운동가들은 빛바랜 추억으로만 기억되어야 할까? 거기엔 하와이까지도 미친 일본의 영향력이 있다. 영사관 직원이 밀정이 되어 살피어 단체 계보까지 만들던 상황에서 당연히 임정의 독립 자금 지원은 비밀 활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슬픈 독립 운동의 역사가 있다. 당시 하와이 사회에는 교육, 문화 운동에 주력하자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와, 무장 투쟁을 해야 한다는 박용만이 중심이 된 국민회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던 시절이었다. 그 중에서도 미국 내 독립 운동에서는 이승만의 영향력이 컸던 시절, 그러기에 국민회 계열의 한인 애국단 사람들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그분들의 활동이 해방 후에 알려지지 않은 데는 조국으로 돌아가 대통령이 된 이승만과, 그 수하들의 횡포도 있다. 심지어 해방 후 고국에 돌아가고 싶었던 이분들에게 비자조차 내주지 않을 정도의. 

1997년에서야 한인 애국단 임성우 선생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현도명 선생은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2018년에 찾아간 다큐를 통해서 겨우 김예준 선생님의 존재가 밝혀졌다. 그러나 여전히 한인 애국단 여덟 분 중 나머지 분들의 '존재'는 그림자에 쌓여있다. 

by meditator 2018. 8. 16. 1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