孟子曰(맹자왈)  人皆有不仁人之心(인개유불인인지심)
惻隱之心(측은지심)은 人皆有之(인개유지)하며
惻隱之心(측은지심)은 仁也(인야)요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라면 사람에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측은지심(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그 측은지심이 인의 시작이다.

중학교 때였을까? 아니면 고등학교 때였을까? 학교 윤리 수업 시간에 배웠던 맹자의 성선설, 그 기초가 되는 문장이다. 맹자는 그 예를 우물을 향해 기어가는 아이로 들었다. 엉금엉금 우물을 향해 기어가는 아이,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 순간 가슴이 철렁내려앉으면서 측은한 마음이 엄습할 것이요, 구하려 달려갈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를 구하려는 마음은 그 아이가 어느 집안 아이라는 헤아림이 앞서 부모와 좋은 인연을 맺으려는 마음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도 아니고, 구하지 못했다 욕먹을까봐 달려간 것이 아닌, 이해득실이 앞선 마음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어쩌지 못한 마음이 앞서서 달려간 것이며, 바로 여기에 인간의 본성, 인, 착함의 근원이 있다고 하였다. 



뒤늦게 배우는 맹자의 측은지심 
시시하다고 생각했었다. 동양 최고의 사상가라는 맹자가 '인'을, 착함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는 것도 그렇고, 우물에 빠진 아이 구하는게 인이라니, 그 별 거 아닌 마음이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사는 시간만큼, 살아온 세상만큼 그 '시시한 생각'이 참 별나라의 일만큼이나 '인간'에게는 '난망'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학창 시절 이해하지 못했던 '시시한' 인에 대한 해석을 드라마에서 발견하게 된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나의 아저씨>에서. 

상무 후보 인터뷰 과정에서 등장한 '이지안', 깨끗한 이력서, 특기가 달리기인 이 '인간'을 뽑은 것에 대해 윤상무(정재성 분)는 혹독하게 꼬집는다. '스펙'이 차고 넘치는 세상, 딸랑 그 한 줄에 뽑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그 질문은 이지안도 했었다. 왜 자기를 뽑았냐고. 그때 박동훈(이선균 분)은 달리기로 부터 '내력'을 끄집어 냈었다. 그리고 이제 윤상무의 다그침에 박동훈은 '스펙'좋은 인간들의 '부력'(浮力)을 들어 이지안의 '내력'을 다시 한번 증명해 낸다. 그런데 새삼스레, 그 '달리기'에서 내력을 떠올린 박동훈의 혜안에서 '측은지심'이 떠올랐다. 너도 나도 줄줄이 '스펙'을 자신 앞에 훈장처럼 다는 세상에, 달리기 말고는 칸을 채울 수도 없는 이지안에게서 박동훈은 일찌기 '측은지심' 즉, 그 무엇도 내세울 것 없는 우물가에 던져인 아이에 대한 연민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나의 아저씨>가 시작하기 전부터, '아저씨'와 '아가씨'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억측에 시달렸던 드라마는 꿋꿋하게 14회차에 이르기까지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인간에의 연민'이라는 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득을 해왔다. 그리고 그 시작은 드라마에서 그려지지 않았지만, 이력서에 딸랑 '달리기'라고 밖에 쓸 수 없는 한 파견직 사원에 대한 박동훈의 '연민'으로 부터 시작되었을 듯하다. 그리고 그의 오지랖은 틀리지 않아, 이지안은 역시나 '측은지심'이 아니고서는 돌아보아 지지 않을 '인간'이었다. 소녀 가장도 아니고 '손녀 가장', 몇 줌의 커피 믹스로 버텨내는 부모가 남긴 빛을 갚아내야 하는 일상, 그리고 낙인과도 같은 범죄의 내역. 

그리고 그 '측은지심'이 아니고서는 '돌아보아지지 않을' 인간을, 그 역시 이제 '우물가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처지'에 놓인 박동훈이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고 '공감'하기 시작한다. 그 누구도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등 두드려 줄 사람이 없어, 스스로 스스로 홀로 다독이며 견뎌왔던 박동훈이 눈밝게 발견해 냈다. 그리고 그 박동훈을 역시나 '같은 마음'으로 이지안이 '공감'했고. 그들은 '남자'와 '여자'였고, '아저씨'와 '아가씨'였지만, 그런 사회적 존재 이전의 '인간'으로 서로를 '측은지심'을 가지고 '공감'하고 '동지'가 되었다. 상무가 된 박동훈이, 그 어떤 축하를 받아도 그의 눈 한 구석이 비어보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 그건 마치 어려서부터 유일한 친구였던 겸덕(박해준 분)이 친구들 사이에서 '언금'의 존재가 되어왔던 그 시절과도 같다. 결국은 그들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에 눈물이 핑 돈 얼굴을 숨기기 위해 밖으로 홀로 나서야 했던 그런 사이가 되었다. 



<나의 아저씨>; 연민의 서정시 
<나의 아저씨>를 채우는 건 온통 '연민'이다. 동생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박동훈의 형 상훈(박호산 분)은 미처 동훈의 집에 발조차 들이지 못한다. 내 동생을 두고 바람을 핀 제수씨한데 악다구니를 하는 대신, 그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찾아온 동생을 눈물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끝에서 자신이 못나서 제수씨를 고생만 시켰다고,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홀로 삭이려 했던 동생이 불쌍하다며 눈물을 쏟는 상훈, 그의 부질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나의 아저씨>를 채우는 정서다. '형제들끼리의 참치 회식'을 핑계대지만 가게 밖으로 나와서 고개를 잔뜩 빼고 박씨 형제를 기다리는 동네 친구들의 하염없는 우려와 기다림의 마음이다. <나의 아저씨>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변변찮다. 형도, 동생도, 주변 사람들도 괜찮아서 돌아봐져지는 것이 아니라, 불쌍해서 접어주어야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리고 그래서 그들에게 마음이 간다. 드라마는 오늘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의 이야기처럼 드라마에서 '향수'를 느낀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그게 낯선 세상에 살게 되었다. <나의 아저씨>에 대한 '오독'은 '연민'이 낯설어진 세상의 반증이다. 우물가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기를 봐도, 주변을 살피고, 혹시나 나의 연민어린 행동이 오해를 받을까 저어하는 세상이 되었다. 아저씨가 아가씨에게 연민의 마음을 보이면 그 저의를 헤집고, 그게 어떤 마음일까 가늠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윤상무가 이지안의 숨겨진 기록을 뒤짚어 그 '전과'를 헤집듯이, 그 '연민'의 갈피를 헤집어 그 속에 혹여라도 한 방울 튕겨진 '남자', 혹은 '여자'의 마음을 들추어 내려 하는 데 익숙해졌다. 아니, 인간의 연민이 그냥 낯설어졌다. 경험해 보지 않은 이 '정서'에 다들 이 감정이 무엇일까 의문 부호를 가지고 14부의 여정을 쫓아왔다. 

그런 세상에 대해 박동훈의 일갈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당신도, 나도 누구도 그럴 수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범죄'가 아닌, '정당 방위'에 대해 '법'이 보호하고자 '흔적'조차 지워 버렸는데, 그것을 끄집어 내서 다시 한번 이지안을 '재판'하려는 세상에 대한 그의 높은 목소리는, 기역자를 놓고, 굳이 낯이라 우기고 싶은, '연민'이 상실되어, '인간됨'이 멸종되어 가는 세상에 대한 일갈의 다름아니다. 그저 곧이 곧대로 보이는 대로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버거운 세상을 저마다 헤쳐 나가야 하는 '인간에의 연민', 그 이해의 마음에 대해 드라마는 간곡하게 전한다. 

하지만 결국 이지안의 말처럼, 사람들은 무슨 보물찾기의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이지안의 숨겨진 사연을 듣고 웅성거린다. '이해' 보다는 '곡해'가 쉬운 세상, 여전히 박동훈은 '멸종 위기의 동물'처럼 홀로, 이제 4번 이상 잘해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지안을 향해 '질주'할 것이다. 그의 질주가 부디 그만의 이해받지 못할 외로운 레이스가 되지 않기를, 우리가 잃어버린 연민이 아름답게 번져가기를. 부디 '그들이 뿌린 연민'의 대가가 처절하지 않기를. 이제 마지막 2회를 남긴 드라마에 대한 소망이다. 
by meditator 2018. 5. 11. 1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