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것일까? 2015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처럼>이란 영화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한 관객들 중 여러 명이 결국엔 다음과 같은 자충수에 도달하고 만다. 그래서 도대체 '프랑스 영화'란 것이 무엇이냐고? 미적인 화면, 모호한 줄거리, 거기서 난해한 수학 공식보다 더 어렵게 찾아야 하는 철학적 명제? 아마, 1895년 이래 가장 일찌기 뤼미에르 형제 이래 영화라는 문화적 장르를 구축한 프랑스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내린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 듯 싶다. 하지만, 적어도 2018년에 '프랑스'의 영화를 본다는 건, 지금, 우리가 여기서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이야기를 만난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그 확실한 '다른' 이야기를 선보인 작품이 지난 4월 5일 개봉했다. 바로 브루노 뒤몽 감독의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하 슬랙 베이)>이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보는 바와 같이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다. 하지만, 이 제목에 낚여서 혹은 이 제목에서 연상되는 '스릴러'의 장르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 영화를 접한다면 아마도 십중팔구 난감할 듯하다. 영화가 열리면서 벌어진 살인 사건, 혹은 연쇄 실종 사건에 집중하고 싶지만, 정작 영화는 한 눈을 너무 많이 판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브루노 뒤몽 감독의 장기와도 같은 것이다. 



살인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이 브루노 감독의 작품에서는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14년 <릴퀸퀸>이란 선례가 있다. <릴 퀸퀸>에서도 <슬랙 베이>에서 처럼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사건을 두 형사가 추격한다. 단지 차이라면 1910년의 바닷가 마을, 그리고 현재 어느 시골 마을, 하지만 그곳에서는 똑같이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두 명의 형사가 그 사건을 조사한다. 그런데, <릴 퀸퀸>에서나, <슬랙 베이>에서나, 살인 사건을 조사하려 하지만, 형사의 시선 안에 드는 건, 그리고 영화가 주목하는 건 '사건'이 아니다. 외려 사건은 곁등으로 제쳐지며,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 군상들을 통해, '사건' 보다 더 '심각한 상징적 현실'과 관객들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제목이 아닌 원제 <Ma loute>이다. loute는 속어로 loulou, 젊은 처녀라는 뜻이다. 하지만 <슬랙 베이> 속 뱃사공 네 큰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이중적 의미는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해안을 지닌 바닷가 마을, 그곳은 척박한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어부들의 마을인 동시에, 1910년 한참 부를 누리는 프랑스 중상층들의 여름 휴가지이다. 그곳 바닷가 절경이 보이는 언덕 위에는 매년 그곳에서 여름을 지내는 앙드레(파브리스 루치니 분)의 저택이 있다. 여름을 보내기 위해 찾은 앙드레와 그의 아내 이사벨, 그리고 그의 두 딸과 조카가 그곳에서 지내고 있다. 아직 활동적인 아이들은 연쇄 살인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마을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고, 그러다 한때는 마을에서 가장 유능한 어부였지만, 이제는 바닷가를 건네주는 나룻배 뱃사공으로 20센트씩을 받으며 살아가는 가난한 어부와 그의 아들 마루트를 만나게 된다. 

한 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앙드레의 조카 빌리와 어부의 아들 마루트, 영화는 '살인 사건'은 차치하고, 이 '소나기'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두 청춘과 두 사람의 가족들의 이야기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결국은 '비극'이 되어버린, 되어버릴 수 밖에 없는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의 '아이러니함'이야말로 바로 브루노 뒤몽 감독이 주목하는 바이다. 



마루트 혹은 나의 그녀, 빌리, 그들의 엇갈린 만남 
마루트와 빌리의 사랑은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만큼이나 어우러지지 않는다. 우선 자신을 찾아온 형사들에게 한껏 무슨 무슨 양식을 읊조리며 자신들의 여름 별장의 고급스러움을 거들먹거리지만, 결국 시멘트를 쳐바른 구조물에 불과한 저택에 사는 전통있다는(?) 부르조아 가문의 빌리와, 썰물이 빠진 바닷가를 단 돈 20센트에 손님을 날라주는 제 아무리 정성들여 써봐도 꼬질꼬질한 선원 모자를 쓴 마루트의 환경은 이질적이다. 

엄마 오드(앙드레의 누나, 줄리엣 비노쉬 분)에게서 야단을 맞고 뛰쳐나와 마루트와 함께 바다로 나갔다 죽을 뻔한 빌리를 구해준 마루트네에게 오드와 앙드레 가족이 감사를 표명하지만, 정작 빌리가 마루트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자 대번에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생명의 은인이라며 빌리의 친구라며 마루트를 식사에 초대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거친 말 한 마디에 가족들은 대놓고 조롱한다. 

운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마을 사람들의 생업의 터 앞에서 잔뜩 겉멋을 부린 채 외식을 즐기는 앙드레 부부가 날리는 진심이라고 1도 없는 허세 가득한 삶의 찬가는 바로, 이들 '시멘트 덧칠하듯 '돈'으로 떡칠한 졸부, 그러나 자신들은 전통깊은 가문이라는 '부르조아지'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그들의 가식과 허세와 자비는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가 유지될 때뿐, 빌리의 사랑 고백처럼 그곳에 금이라도 갈 양이면 언제든 태세 전환을 하며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변하며, 성모상 앞의 오드의 장광설 하소연처럼 오로지 자신들 중심의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살인 사건으로 시작하여, 정작 두 형사의 범죄 수사보다, 빌리의 가족들은 주의깊게 살펴보기 시작하는 영화는, '고어'한 살인 사건의 전모보다도 어쩌면 외양에서부터 기괴한 앙드레네 가족을 샅샅이 관찰하는 데 더 집중한다. 

앙드레 가족의 외양은 이른바 '정상적'이지 않다. 두 팔을 휘적이며 하지만 자신의 몸을 제대로 못가누는 앙드레와, 자전거 하나 제대로 타기 힘든 그의 처남이자, 매제인 크리스티앙의 신체도 정상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두 집안의 갈등을 초래한 주인공, 빌리의 비정상 역시 만만치 않다. 마루트가 한 눈에 반해버린 빌리, 그러나 형사들은 그녀(?)의 정체성에 헷갈려한다. 빌리라는 남자 아이의 이름, 짧은 머리의 소년의 복식으로 나타나는 싶던 빌리는 마루트 앞에서는 가발까지 쓴 천상 소녀의 모습이다. 당연히 이 곱디 고운, 심지어 계급적 선입견없이 자신에게 빠져든 상류 계급의 소녀에게 마루트 역시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녀를 안아, 그 몸을 확인할 때까지. 

그리고 이들의 '비정상적'인 신체는 그들의 위선적 도덕의 상징이자 결과이다. 영화는 <릴 퀸퀸>이 살인 사건을 매개로 여전히 프랑스에서 지속되는 종교적 갈등, 그리고 거기서 드러나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완고한 사람들의 아이러니함을 다루었듯이, 역시나 살인 사건을 매개로 아니 어쩌면 불가피했을 살인이라는 생존 행위,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부르조아 계급의 '부도덕'을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신랄하게 꼬집는다.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등장하듯, 신의 계시에 의해 공중 부양을 하듯, '그들'은 허공에 둥둥 떠있다. 그들의 세상은 시멘트로 덧칠했지만 우아한 양식의 저택이며, 갖은 미사여구를 붙이지만 사실은 속물들의 세상이고, 심지어 그들의 기괴한 신체는 그들이 지난 날 행했던 도덕적 파탄의 증거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아한 척, 심지어 신의 계시라 칭송하지만 현실에 발 붙이지 않은 채 바람처럼 바닷가 마을을 부유하다 바람처럼 떠날 것이다. 



빈부 격차가 심했던 1910년 프랑스, 그곳 슬랙베이에선 
그리고 그런 그들의 맞은 편에 그들을 오로지 먹고사니즘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루트'네가 있다. 영화는 살인 사건을 논외로 제쳤지만, 본 관객들은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벌인 '사건'에 대한 개운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한다. 부도덕과 범죄?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10년대이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우리가 배운 서양사에서 서구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그 산업적 발전이 곧 모든 이들의 부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영화 속 전통있는 부르조아 가문이라는 앙드레네 가문 같은 집안은 여름 휴가를 한적하고 아름다운 해변에서 하녀를 두며 지낼 정도가 되었겠지만, 마루트네와 같은 하층민들에겐 여전히 먹고 사는 것이 요원한 과제인 시기였다. 19세기 중반 까지도 서구인의 수명이 45세에서 50세 정도였다. 아일랜드에서 감자 파동으로 인해 1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 19세기 중반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전히 잘 산다고 하는 유럽은 '기근'과 싸웠다. 그리고 <슬랙 베이> 속 마루트 네의 범죄는 바로 이런 '기근' 속에서 한때는 잘 나갔지만 이제는 20센트(지금으로 250원)를 받으며 손님을 실어나르며 살아가는 가난한 가족의 현실이다. 우리에게는 이젠 그저 '고어'할 뿐이지만, 당시에는 어쩌면 '선택 여지가 없는 현실'이었던. 

<소나기>처럼 만났던 부르조아 가문의 빌리와 가난한 어부네 마루트의 풋사랑은, 정작 마루트 네의 숨겨진 비밀 때문이 아니라, 빌리의 숨겨진 진실 때문에 파탄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핏물이 든 옷을 입고 묻어달라던 소녀처럼, 배반당했다고 분노했던 마루트의 순정은 빌리를 구한다. 바람처럼 빌리네는 바닷가 마을을 떠돌아 떠날 것이고, 마루트는 남겨질 것이다. 해프닝이 된 사건, 사건보다 더한 부르조아 가문의 부도덕, 그것이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 도달한 결론이다. 
by meditator 2018. 4. 9. 1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