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이 행복한 가정의 '로망'이던 시절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이른바 '세계 명작 50권' 한 질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세계의 명작 중에 추려낸 겨우 50권의 작품 중에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작품이 무려 두세 권 들어 있기가 십상이었다. 바로 <소공녀> <소공자> <비밀의 화원> 등이다. 이제는 중년, 혹은 노년에 들어서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제목의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과 서사는 달라도 주제는 일관된 편이다. 어려움에 빠진 소년, 혹은 소녀가 주변의 학대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심성과 의지를 굳히지 않고 지내다 결국은 '해피엔딩'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소년 세드릭이 완고한 영국 귀족 할아버지와 홀로 살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소녀가 아버지의 죽음과 파산으로 하루아침에 다락방으로 쫓겨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들이다. 

소년과 소녀는 위기를 겪으며 '집' 혹은 즐거운 나의 집으로 상징되는 '행복한 가정'을 잃는다. <소공녀>의 새라는 비록 아버지뿐이었지만 인도에서 성공한 아버지 덕택에 기숙 학교에서 공주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실종으로 새라는 모든 것을 잃고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된다. 기숙 학교 공주에서 기숙 학교 '하녀'가 된 새라. 하지만 생전 겪어보지 못한 배고픔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힘든 시절을 '상상놀이'를 하며 견뎌낸다.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하룻밤 판타지에서 현실로 변하는데, 그 '해피엔딩'에는 꼭 '그녀들이 놓친 어려움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따른다.

 영화 <소공녀>의 포스터

영화 <소공녀>의 포스터ⓒ 광화문 시네마


'힘든 환경을 이겨내는 밝고 따뜻했던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는 시절의 변화와 함께, 신데렐라, 백설공주와 함께 세계 명작의 대열에서 사라져갔다.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돈을 번 아버지 덕택에 잠시 공주 대접을 받던 새라에게 닥친 우연한 해피엔딩은 더 이상 과거처럼 찬사를 받을 수 없었다. 더구나 '공녀'라는 시대착오적인 제목부터 거부감의 대상이 되었다. 더 이상 우연한 행운을 얻은 '소공녀'가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세상의 사람들은 '공주'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8년 또 다른 소공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돈 잘 버는 아버지 덕택에 공주 대접을 받은 적도 없다. 하지만 새라가 기숙학교에서 방을 잃고 다락방으로 쫓겨나듯, 또 다른 소공녀는 알량한 월세방마저 잃고서 여전히 꿈을 꾼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미소(이솜 분)'라는 인물이 있다. 이십 대 후반, 혹은 삼십 대 초반 정도의 나이. 자칭 자신의 직업이 '가사 도우미'라 하는 <소공녀>의 여주인공 이름이 미소이다. 그녀는 건물 외벽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 도달하는 방 한 칸에 산다. 집주인이 세를 놓은 곳에 다시 세입자가 세를 놓은 방이다. 방 안에서도 온기 하나 없어 껴입은 옷을 벗고 벗다, 너무 추워 애인과의 섹스를 다음 해 봄으로 미뤄야 할 정도로 추운 곳이다. 애인 한솔(안재홍 분)은 기업의 기숙사에 살며 대학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빠듯한 삶을 산다. 

미소는 '가족'의 그림자 하나 없이, 쉴 사이 없이 지낸다. 그녀의 머리색을 침범하는 '새치'를 막아내기 위한 한약을 꼬박 챙겨 먹는다. 그리고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 갑에 드는 돈을 벌기 위해 가사 도우미를 한다. 남들은 '가사 도우미?'하며 어색하게 억양을 올리며 물어보지만, 적어도 그 일을 하는 순간 그녀는 전문 전동기구까지 동원하며 청소하고, 집주인이 원하는 갖가지 반찬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프로다.

하지만 일을 하는 순간만 프로일 뿐,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도시의 '아마추어'처럼 보인다. 아니, 애초에 이 도시가 강요하는 편제된 삶에 자신을 맞출 의도가 없다. 담배값이 오르면 담배를 끊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싼 값의 담배를 구한다. 위스키 값이 오르고 방세가 오르자, 그녀의 선택은 위스키 한 잔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방을 포기한다. 그리고 방을 포기한 그녀는 과거 한 때 자신의 방을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던 밴드의 멤버를 찾아다니며 잠시 의탁을 구하는 여정을 떠난다.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 갑을 위해 방을 포기하고 짐 싸들고 거리에 나선 미소. 영화는 미소의 여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집'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 사회에서 '집'은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 조건이다. 집이 있고, 거기에 머무는 기본적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든 청춘'의 시대의 퍽퍽함을 삼포 세대니 하는 세대 용어로 항변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 <소공녀>는 집을 가질 수 없는 청춘의 시대에 질문의 깊이를 보탠다. 누군가에게는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위스키 한 잔, 그리고 백해무익하다는 담배, 그 의미를 말이다. 미소가 찾아간 옛 밴드 멤버들은 그녀에게 당연하다는 듯 "아직도 담배를 안끊었니?"라거나 "넌 아직 철이 안들었구나"라고 말한다. 그녀의 사치스럽고 쓸 데 없어 보이는 '취존(취향존중)'을 통해, 영화는 '과연 우리에게 집은 왜 필요한가'를 묻는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광화문 시네마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광화문 시네마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을 위해 집을 포기하다니

그리고 이와 같은 질문을 두텁게 하기 위해 영화는 집이 있는 옛 동료들을 비교한다. 한때는 미소처럼 위스키 한 잔과 담배를 즐기고, 음악이 좋고 함께하는 게 좋아서 어울렸던 동료들. 하지만 이제 이들은 이 사회에 '철든 어른'들이 되어 살아간다. 그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 

잘 나가는 직장인이 되어 사는 친구는 쉴 사이 없이 몰아치는 업무의 피로를 담배 한 대 대신 포도당 링거로 대신한다. 결혼을 위해 20년 동안 매달 100만 원의 월세 아닌 월세로 아파트를 마련한 후배는 이제 사랑하는 이 없이 '장기 이자'만을 짊어진 채 외려 미소의 위로를 받는다. 일찌감치 결혼했던 또 다른 동료는 집은 있지만, 미소를 하루 재워주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층층시하'의 처지다. 그리고 동료가 선택한 집에는 한때 작곡을 잘 했던 그녀의 음악을 위한 자리는 없다. 

방이 스무 개도 넘어 미소에게 거뜬히 방 하나 쯤은 내어줬던 선배 언니의 담장 높은 집에는 그녀가 두 손 모아 시중 들어야 할 남편의 그늘이 짙다. 보컬이었던 선배의 집에서는 식구들이 '즐거운 나의 집'을 합창하지만, 노래가 끝난 그곳엔 '미소'를 감금하려는 강박과 허울뿐이다. 과연 그들이 안주하는 집은 미소의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보다 가치 있는 걸까?

영화는 예전 멤버들의 집을 일주한 여행을 통해 '집'이라는 경제적 가치로 매겨지는 삶의 가치를 묻는다. 집이 당연하게 필요하다는 사회, 그런데 그 '집'은 무엇을 위한 집인가? 그래서 당신은 집을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는가? 어른이 되어 집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포기한 것들이 진정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영화는 기꺼이 세상에 편재되어 살아가기 위해 애닳아 하는 이 시대 청춘들에게 '우문'을 던진다. 이는 최근 트렌드가 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대한 또 다른 담론이다.

하지만 그 우문에 현답은 없다. 미소는 그저 위스키와 담배와 함께, 애인이 옆에만 있어주면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 한솔은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헌혈 센터에서 피를 뽑아야 하는 신세다. 한솔은 가난한 연인의 삶을 견디는 대신, 웹툰 작가로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한솔은 돈을 벌어 두 사람의 '스위트 홈'을 구하기 위해 세 배의 월급을 주는 사우디 아라비아로 떠난다. 그렇게 유보된 꿈, 혹은 포기된 꿈 대신 '집을 갈구하는 세상에서 이제 미소는 새치가 번지는 걸 막기 위해 먹던 한약 값마저 구하기 힘들다. 

미소는 흰 머리를 날리며 거리에 남는다. 어둠이 드리운 도시, 그 강변 둔치에 오도카니 불 켜진 미소의 텐트, 미소의 소확행은 그 '불법 점유물' 텐트처럼 불온하고 아득하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소공녀>지만,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이다. 동화 속 집을 잃은 소녀의 이야기인 듯 시작된 영화는 '미소 서식지'라는 신조어를 통해 반문을 한다.

정혜윤은 그의 책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마이크로헤비타트(미소 서식지)'에 대해 말한다. "비가 오면 잠시 피해갈 처마 같은 곳, 지렁이 수준의 숨어있을 만한 곳, 새 수준, 고양이 수준... 인간 한 명에게도 이 도시에서 잠시 쉬어갈 곳이 필요하답니다"라고. 미소한 미소가 서식할 만한 공간에 대한 질문. 더 이상 앞 세대처럼 집으로 재테크를 할 여력이 없는 세대에게 집은 최소한의 서식할 '여지'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한 서식지'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 <소공녀>는 이솜이라는 배우에 기대어 풀어놓고자 한다. <족구왕>의 기획자였던 전고운 감독의 '여성 버전 족구왕'이랄까.

by meditator 2018. 3. 26. 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