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매 시리즈가 등장할 때마다 우스개 소리로 마블 히어로 사이의 '재력'과 '능력'에 대한 비교하는 '관례'같은 게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쨌든 결국은 마블 히어로의 본질은 지구를 파괴하는 나쁜 놈을 제압하는 그 '힘'에 있으니 말이다. 바로 그런 '비교'에서 지금까지 압도적 우위를 점했던 건 자신의 사업체와 강력한 아이언 맨을 가진 '토니 스타크'였었다. 하지만, 이제 그 토니 스타크의 재력마저 우습게 되고 마는 '다크 호스'가 등장했다. 아니 '다크 팬서', 바로 지난 2월 14일 개봉한 <블랙 팬서>의 주인공, 와탄다 왕국의 왕위 계승자이자, 와칸다에만 존재하는 최강 희귀 금속 '비브라늄'의 소유주이며, 그 '비브라늄'에 기반한 와칸다의 선진 과학 기술력과 신화적 힘을 '합체'한 초인적 힘을 자랑하는 '블랙 팬서'는 토니 스타크보다 '부자'이며, 캡틴 아메리카보다 '힘이 센' 극강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통해 어벤져스의 일원으로 윈터 솔져를 막는데 합류했고, 그에 대한 '복수' 대신 '냉동'으로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와칸다 왕국의 수장, 그게 <블랙 팬서>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지난 14일 개봉한 <블랙 팬서>는 바로 그 '시빌 워'의 과정에서 급작스럽게 아버지를 잃고 조국 와칸다의 왕으로 재위에 오르게 될 티찰라(재드윅 보스만 분)으로 부터 시작한다. 



자원 강국 와칸다의 국왕 블랙 팬서 
아프리카의 최빈국으로 알려진 와칸다 왕국, 하지만 블랙 팬서의 비행선이 타고 들어간 비밀의 도시 와칸다는 지구 최강의 금속 비브라늄 광산을 기반으로 한 최첨단의 도시라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이 '자원'에 기반한 최강의 부를 가진 비밀스런 아프리카 왕국이란 설정은 이미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오늘날 다수의 아프리카를 비롯한 이른바 제 3세계의 국가들이, 그 '천연'의 자원을 가지고도 그것들을 '수탈'을 당함으로써 산업혁명 이후의 부국 대열에서 방치된 상태라는 것을, 영화는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그 누구에게도 '수탈'당하지 않아, 아니 '수탈'당하지 않기 위해 '부유한 국가'가 된 와칸다 왕국은 이른바 제 3세계 운동의 한 방향이었던 '자원 민족주의'의 가장 이상적 '환타지'를 스크린에 구현해 낸다. 

그렇게 비밀의 국가 와칸다, 비브라늄이란 자원을 기반으로 한 최첨단의 과학 왕국, 하지만 비행접시와도 같은 비행선에서 내린 차기 와칸다의 국왕이 될 티찰라를 맞이한 건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마티스, 그리고 다수의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준 부족적 문화가 현란한 색채의 복식 등을 통해 살아난 전통적 아프리카다. 그리고 그 전통적 문화는 이어진 티찰라의 왕위 계승 과정을 통해, '첨단'의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국'이라는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는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콜라보되어 있는 국가 와칸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와칸다의 막강한 존재감은 오늘날 '아프리카'의 후진성을 그 부족적 정치 체제의 한계로 설득하고자 하는 입장에 대한 환타지적 반격이 된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처럼 아프리카 신화에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신화속 짐승 표범은 와칸다의 상징으로 심장 모양의 허브를 통해 와칸다 국왕의 놀라운 능력으로 현현되는 것으로 영화는 표현해 낸다. 앞서 토르 시리즈가 북유럽 신화를 길어 올려 현대로 온 토르의 서사를 풍성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아프리카의 영웅 블랙 팬서는 와칸다라는 나라로 상징되는 아프리카 민족의 신화적 배경에서 탄생된다. 하지만 언제나 마블의 히어로 영화가 그러하듯 블랙 팬서 역시 모든 신화적 영웅이 그러하듯 혹독한 탄생 서사를 거치며 히어로로써의 설득력을 얻어낸다. 

그 첫 번째 관문이 되는 건 바로 와칸다 고유의 즉위식이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부족 연합이라는 고유의 정체성을 살려낸 영화는 그 이질적 부족의 연맹을 타 부족 절멸이라는 끝없는 내전 대신, 가파른 폭포수를 배경으로 한 족장 후보와 그에 이의를 제기한 타 부족장의 죽음을 건 혈투로 대신한다. 전사를 이끄는 무리의 장으로서의 부족장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살려낸 이 '싸움씬'은 와칸다 왕국의 수장의 정당성과 동시에 블랙 팬서의 힘의 배경에 대한 설득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얻어내고자 한다. 

와칸다 왕국의 형성 과정에서 합류하지 않고 산위로 올라간 늑대 부족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무난하게 왕좌에 오르게 된 티찰라, 하지만 그는 아직 비브라늄이라는 최강 금속을 가진 와칸다 왕국의 수장으로서 자신에 대한 비젼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이고, 이는 그의 앞에 나타난 사촌 형제의 존재와 함께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흑인 민권 운동의 상징, 블랙 팬서 
<블랙 팬서>에서의 이 티찰라에게 던져진 도전이 절묘한 건 그저 영화 속 히어로의 극적 갈등의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흑백 갈등의 역사를 히어로의 성장 서사로 품어냈다는 점이다. 영화 속 히어로의 이름 블랙 팬서, 이는 흑인 민권 운동 역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단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는 티찰라의 원죄로서 그의 아버지가 LA에서 암약하던 동생의 배신을 품는다. 동생을 찾아간 티찰라의 아버지는 조국 와칸다를 지키기 위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이 LA 아파트 비극은 블랙 팬서 당의 궤멸을 가져온 사건과도 맞물린다. 

흑인 민권 운동 지도자 말콤 엑스가 살해된 다음 해 창립된 단체 블랙 팬서는 당시로는 급진적인 맑시즘을 자신의 이념으로 삼는다. 당연히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온건주의에 대립한 이 단체는 전쟁 종식 등의 내용을 담은 강령을 내세우며 경찰들의 부당한 체포에 대항한 폭력 투쟁을 벌였다. 1969년 한 해에만 300명의 블랙 팬서 단체 회원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LA의 아파트를 급습한 14명의 경찰관은 수 백발의 총을 난사하여 두 명의 청년을 살해됐다. 

이렇게 영화는 바로 그 역사적 사건, 역사적 현장의 사실을 영화 속 갈등의 주요소로 복기하며, 그것을 다시 티찰라를 찾아온 킬몽거(마이클 B 조던 분)을 통해 오늘의 갈등으로 재연한다. 아프리카의 국가 와칸다가 가진 비브라늄이라는 재원이자 자원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가로 대립하며 블랙 팬서 VS. 블랙 팬서의 대결을 벌이는 티찰라와 킬몽거의 대립은 오늘날 테러리즘이란 이름으로 귀결되는 약소국 민족주의 운동의 현실을 품어낸다. 



마치 그런 식이다. 우리의 역사 행간에서 사라진 약산 김원봉이 영화 <밀정>과 <암살>을 통해 귀환했듯이, 김원봉의 '의열단'처럼, 흑인 민권 운동의 역사 속 한 주역이었던 블랙 팬서는, 마블의 히어로 영화로 귀환했다. 가장 전투적이었으며, 비타협적인 운동 단체였던 블랙 팬서가 세계 평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영화 <블랙 팬서>는 그래서 아이러니하면서도, 감격스러운 귀환이 된다. 

마블의 야심찬 기획 <블랙 팬서>는 기껏 한 편의 히어로 물을 통해 문화 콘텐츠가 풀어낼 수 있는 신화와 예술과 그리고 역사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물론 누군가는 멋진 슈트의 영웅 블랙 팬서에 열광하겠지만, 누군가는 마치 박물관을 방문하듯 영화 속 아프리카의 색감에 홀렸을 것이요, 또 다른 누군가는 티찰라의 원죄가 된 그 LA의 아파트를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환타지로 복원한 와칸다로도 위로되지 않는 방대한 자원과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도 슬픈 부족으로 남은 아프리카를 기억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영화관에 가서 '문화'와 '역사'를 배운다. 
by meditator 2018. 2. 23. 2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