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주제가 상을 <위대한 쇼맨>에게 양보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장편 에니메이션상>을 수상하며 디즈니와 픽사는 2016년 <인사이드 아웃>, 2017년 <주토피아>에 이어 연 3년 성공적으로 골든 글로브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어쩐지 아쉽게도 느껴진다. 내 머릿속, 아니 내 마음의 세계 탐구라는 신비함 그 이상, 치유와 힐링이 되었던 <인사이드 아웃>이나, 최근에서야 우리 나라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여성의 사회적 자존의 문제를 비롯하여 성과 인종 평등의 문제를 발빠르게 다루었던 <주토피아>에 비해, 한바탕 축제와도 같았던 <코코>는 '가족주의'의 전통이 유구한 가장 디즈니스러운 픽사의 작품인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라프의 활약을 다룬 단편 에니메이션이 끝나고, 멕시코 버전의 디즈니 로고송이 등장하면서 펼쳐지는 <코코>의 세계는 그저 '가족'의 화합이라는 주제로만 한정하기에는 이야기할 꺼리가 만다. 특히 최근 우리나라에서 거뜬히 1000만을 넘은 <신과 함께>와 함께, 흥행세를 이어가는 <코코>는 비록 '한국'과 '멕시코'로 지역적 배경은 다르지만, '죽은 자의 세계'를 통해 '산 자의 삶'의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죽은 자의 세계에서 길어올린 산 자들의 이야기
<코코>와 <신과 함께>는 공교롭게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의 이야기다. 아이를 구하려다 죽은 소방관 김자홍(차태현 분)은 당연히 저승차사들을 환생시켜줄 의인이라 여겨진 7번의 저승 재판에서 매번 브레이크가 걸린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건, 바로 아픈 어머니와 동생을 버리고, 심지어 직계 비속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될 범죄를 저지르다 도망갔던 사실이다. 그리하여 '의인'은 커녕 당장 지옥으로 떨어지게 생겼다. <코코>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은 사람은 물론 주인공이 아니다. 죽은 자들의 날에 뜻하지 않게 그 세상에 들어가게 된 미구엘이 위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헥터'라는 보잘 것없는 해골이 그 실질적 주인공이다. 

두 영화는 모두, 그들이 '살아있을 때' 저질렀던 어떤 행위가 지금 죽은 그들의 위기로 작동한다. 그로 인해 김자홍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생겼고, 헥터는 죽은 자의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동양의 지옥도와, 영원히 절멸, 물론 그 두 처벌 사이에는 엄청난 고통의 간극이 있지만, 막상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느껴지는 심리적 중압감에서는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어쩌면 영원히 잊혀진다는 게 더 마음아프게 다가올 수도 있다. 



김자홍과 헥터, 그들은 젊어 죽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억울하게. 그런데 더 억울한 건 죽은 그들의 영혼조차 위기에 빠진다. 죽은 두 사람에게 내려지는 벌의 핵심은 결국, '가족'을 버린 것이다. 자신들이 지켜고 보호했어야 할 가족을 각자의 이기심으로 버렸다는 '오해(?)가 그들을 죽음 이후의 위기에 몰아넣는다. 물론, 영화는 절정의 위기를 극복하며 두 사람이 받게 될 그런 처벌이 오해였음을 풀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사실은 그들이 이승에서 드러났던 그런 결과적 행동들이, 미처 본의를 풀어내지 못한 '한(恨)'이었음을 영화는 풀어낸다. 그리고 그 '한'에는 여전히 그들이 '가족'을 배신하지 않았음을, 혹은 '가족'이란 것으로 상징되는 '관계'에 대해 스스로 외면하지 않았음을 그려내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은 이후에나마 비로소 그들이 그토록 그리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며 관객들의 누선을 자극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21세기의 가족주의란?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 결국은 눈물을 터트리게 만드는 감동의 가족 상봉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그 '가족'의 장애물들을 살펴보자. 

<신과 함께> 김자홍 모자의 비극은 결국 장애인 어머니와 두 아들의 가난이다. 그들은 가난했고, 나라가 구제해주지 못한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김자홍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이승의 두 모자의 삶을 건져냈다. 미처 어머니에게 드릴 밥통도,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솔직하게 밝히는 진심어린 편지도 전할 기회도 없이 그의 생명을 거둔 저승은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재판을 하네 어쩠네 하지만, 결국 그 재판의 결과가 '어머니의 용서'일 수 밖에 없는 건 김자홍의 오롯한 희생적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식은 '가족'의 굴레를 씌웠지만 결국 이 사회에서 '먹고사니즘'에 희생된 한 개인에 대한 영화적 제의이다. 사실 불교의 저승관을 수용한 영화라지만, 원래 불교에서 이승에서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가장 큰 보상이 되는 '극락 왕생'대신 '환생'이라는 보상을 한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지극히 '현세적'이다. 

가족의 구성원이지만, 사라질 위기에 놓인 헥터는 어떨까? 거기엔 할아버지가 음악이 좋다며 집을 나간 이후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음악을 버리고 '신발'을 택한 마마 이멜다의 또 다른 희생이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남겨진 딸과 함께 살기 위하여 신발 장인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그건 그 집안의 전통이 되어 대를 이어 미구엘에게 까지 가족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이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가내 수공업의 원시적 자본주의 방식이지만, 미구엘의 가족들이 택한 삶의 방식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할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래서 미구엘의 가족에게서 미구엘이 하고자 하는 '음악'이란 그저 자신은 물론 가족조차 먹여살릴 수 없는 무책임한 행동이며, 이 시대의 정신에 위배되는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는 단지 미구엘 가족의 '신발 사업'에 대해 예술지상주의로 맞서지 않는다. 미구엘이 선택한 음악이란게 가족들이 오해한 헥터처럼 엔터 산업이라는 또 다른 자본주의에의 함몰일 수 있음을 짚어낸다. 그런 미구엘 가족이 선택한 자본주의적 전통에 대해 영화는 영화 속 스타로 나오는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에 대한 이면의 실체, 그리고 헥터의 선택을 통해, 그리고 미구엘과 가족의 화해를 통해, '자본'에 맹목적인 삶에 대한 여유로 귀착한다. 신발 사업 대신 음악이라거나, 가족 대신 개인이라거나, 자본 대신, 예술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관계의 신화를 '멕시코 죽은 자들의 축제'를 배경으로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과 함께>에서 그저 한 개인으로서의 '의인'이었던 김자홍은 7번의 재판을 통해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그의 삶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구원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코코> 속 가족의 이단아 미구엘은 헥터를 통해 가족 속에 숨은 '음악적 전통'을 확인받고, 죽은 자들의 축제를 경과하며 가족들에게 승인받으며 또 다른 새로운 가족 관계의 서막을 연다. 21세기에 '가족'은 참으로 진부한 '코드'이지만, 여전히 변주되면 전세계에서 울려퍼진 디즈니의 로고처럼, 과연 지난 시절의 코드로만 치부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화두를 던진다. 

두 영화들은 여전히 사회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코드를 '가족'으로부터 열어가고자 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 트라우마로 버거운 개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가족이란 무게를 짊어진 개인들이 있다. 그리고 개인과 가족을 보다듬어 주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 각자도생의 삶이 있다. 이 전체와 가족, 그리고 개인의 도그마와 그 소통의 신화에 대한 진부하고도 지난한 모색이, 가장 극적인 방식, 그래서 어쩌면 현세에세는 불가능한 '죽음의 제례'를 통해 화해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가, <신과 함께>와 <코코>의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by meditator 2018. 1. 18. 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