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개인을 탄생시킨 근대의 시작은 '사랑'의 시작이다. '의지'와 상관없는 관례 결혼으로'사랑'의 존재를 무용하게 했던 전근대의 종식은 연애 지상주의, 사랑 지상주의 시대의 도래였다. 그러기에 이 시대 고달픈 삶에 짖눌린 젊은이들이 '결혼'과 '연애'를 포기한다는 건, 결국 시대의 재앙이 된다. 그렇게 우리가 몸담고 사는 시대의 대표적 정서가 된 '사랑', 하지만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으로 칭송받는 사랑은 그것을 수호하는 신이 변덕스럽고 심술궃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듯이 불가해하고 변칙적인 감정으로 사람들을 혼돈에 빠져들게 하고, 그 이타의 감정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에게는 잔인한 형벌도 다가온다. 많은 철학자들은 '사해동포주의'로 사랑의 승화를 외치지만, 대부분 비극은 '너와 나', 혹은 '우리'라는 협소한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첫사랑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 
이렇게 장황하게 '사랑학 개론'을 줏어 올린 것은 9월 3일 첫 방송을 탄 2017드라마 스페셜의 스타트를 연 작품이 바로 <우리가 계절이라면> 때문이다. 대문을 나란히 한 이웃집에서 태어나 함께 자라다시피 한 해림(채수빈 분)과 기석(장동윤 분)의 '학교물'의 외형을 띠고 진행된다. 전교 1,2등을 나란히 하며 자전거를 함께 타며 학교 생활을 하는 두 사람. 이제 청소년기의 통과 의례처럼 첫사랑의 홍역을 앓게 된다. 방과 방 사이를 줄로 이어놓을 만큼 가까운 사이인 두 사람. 이제 기석은 수행 평가 과제로 친구들이 장난스레 쓴 해림과의 첫키쓰를 중대 과제로 여길만한 처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찌기 <겨울 연가> 이래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담타기에 이어, 담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새로운 인연 동경(진영 분)은 순탄할 것만 같던 소꼽친구의 첫사랑 전선에 균열을 가져온다. 

우연히 아빠의 핸드폰을 통해 아빠의 외도를 직감한 해림은 아빠의 뒤를 쫓고 그곳에서 동경을 만나게 된다. 결국 외도에 대한 추적은 오해로 드러나고, 해림과 동경은 동병상련 아닌 동병상련으로 서로의 벽을 조금씩 허물게 되고, 반면 해림과의 첫 키쓰에 집착한 기석은 자꾸 해림과의 관계에서 엇박자를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만남과, 오누이같은 관계의 성장통은, 엄마의 생일날 당연하게 여겨졌던 선물의 엇갈린 행방으로 전혀 다른 질감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아빠가 해림의 오해를 받으며 어렵사리 구한 악보, 해림은 그게 당연히 엄마의 선물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당사자는 엄마의 피아노 학원에 새로온 젊은 여선생, 눈물가득 추궁하는 해림에게 아빠는 그런게 아니라면서도, 그냥 주고 싶었고, 좋았다며 사랑의 불가역성에 손을 들고 만다. 

아빠를 한껏 원망해야 할 해림, 하지만, 해림 역시 자유롭지 않다. 당연히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보아와 준 기석의 첫 번째 고백을 들어줘야 할 처지, 하지만 정작 해림 역시 새로온 전학생 동경에게 마음을 흔들리고 만 것이다. 



사랑의 아포리즘, 그러나 
뻔한 사랑의 성장통같았던 이야기는 아빠의 외도 아닌 외도(?)를 통해 '사랑'에 대한 아포리즘'으로 변모한다. 뻔한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라는 속된 경구 대신, 여전히 가정에 성실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른 아빠를 등장시켜, 해림의 뜻하지 않은 두근거림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설명'을 통한 '사랑에 대한 신선한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했던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과연 이 드라마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헷갈리는 이도저도 아닌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구르리 그린 달빛>의 조연출답게 청량한 젊음을 서정적으로 한껏 분위기로 자아냈지만, 과연 목적한 바가 해림과 기석의 성장통인지, 아니면 사랑의 불가역성에 대한 담론인지, 정작 '절정'의 순간에 머뭇거린다. 아빠의 불가역적인 사랑도, 해림 앞에 등장한 동경의 존재로 '단막극'이란 핑계를 대기에는 '소모적'으로 사용한 드라마는, 성장통 그 자체를 '도구'로 삼아, 청춘의 한 시절을 그저 시각화시키는데 천착하고만 만듯한 결과에 이른다. 아름다운 화면만으로 사랑의 불가역성을 설득하기엔 화면은 너무 단편적 나열이었고, 그렇다고 그게 아닌 그저 성장통을 그려내고 싶다기엔 너무 뻔했다. 아니 뻔하다고 하기에도 불친절했다. 가슴 떨림, 그저 좋아함의 감정은 그저 한 컷처럼 지나치기엔 너무 묵직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한 계절이 지나고, 동경은 스리슬쩍 사라져 버리고, 이제 청소년의 터널을 지나버린 해림과 기석은 우정인 듯 사랑인 듯 기차역에서 해림이 원하던 포옹을 하며 끝이 아닌 이별을 하지만, 지난 과정에서 해림과 기석의 감정을 충분히 설득해 내지 못한 드라마는 그 엔딩조차 눈물로 포장된 아름다운 청춘에 대한 장식처럼 여겨진다. 

오히려 도발적이라도 아빠와 해림의 불유쾌하지만 불가피했던 감정에 좀 더 솔직하게 파고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스치듯 지나쳐버린 기석의 잔인한 목격 장면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았으면 어땠을까? <구르미 그린 달빛>처럼 시청률이 필요한 미니 시리즈도 아니고, 비록 '멜로의 법칙'을 내세웠지만 '실험작'으로서의 단막극에 대한 기대를 부푼 채 맞이한 첫 번째 2017 드라마 스페셜의 작품치고는,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좀 안이하지 않았나란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매년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단막극 시리즈가 가진 한계를 손쉬운 '멜로의 전략'으로 통과해 보려는 야심이었을까? 

그러기에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다시 원점에서 단막극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다. 과연 매년 없는 편성을 쪼개어 단막극이 방영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뻔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화면에 담아,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일까? <다큐 3일>을 뒤로 제친 채 끼어든 시리즈라면, <다큐 3일>의 목소리를 제칠만한 특별한 존재감을 기대해 보는 건 무리일까?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도 해줄 이야기가 많아서 좋았던 드라마 스페셜이 '멜로의 법칙'으로 돌아와, 단막극의 생존을 위한 '연성화'가 아닐까란 우려가 드는 가운데, 첫 작품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그 고민의 깊이를 더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멜로는 어찌보면 '근대'와 '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치명적 상흔이다. 그 상흔을 내세워, 심지어 법칙이란 말까지 등장시켰다면 그래도 최소한 드라마 스페셜이라면, 좀 더 치명적인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저 녹록하게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한 잔이 아니라. 

by meditator 2017. 9. 4.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