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곳곳에 숨어있는 불평등과 편견을 허무는 차별에 화난 프로 불편러'들의 이야기 <까칠 남녀>가 4월 24일로 5회를 맞이했다. 프로그램은 '털', '졸혼', '피임', '김치녀', '시선 폭력'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내에 '젠더'와 관련된 민감한 주제를 선택한 덕분에 매회 화제가 되었다. 또한 화제가 된 만큼 '엄연히 여자와 남자의 역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는 식의 정영진 씨 등의 발언이 매회 인터넷 상에서 숱한 질타의 대상이 되며, 5회에도 발언을 할 때마다 '캡춰'돨 것이란 우스개가 등장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과연 이 '우스개'를 웃고 넘어가야 하는 것인지. '한남'과 '페미'라는 양 극단의 용어가 넘쳐나는 세상에 '양성 평등'을 지향하는 <까칠 남녀>의 젠더 토크쇼에 대해 몇 가지 고민을 풀어보고자 한다. 




시선 폭력? 시선 강간?
5회의 주제가 된 것은 여성의 몸을 '폭력적'으로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선에 대한 것이었다. 미국 거리의 실험 영상을 예로 들며, 그런 남성의 '시선'에 대해 여성들의 '고통'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프로그램. 하지만 곧 대다수의 여성들이 '시선 폭력'을 느꼈다는 것과 달리, 그 자리에 참석한 남성 패널들은 이런 여성들의 '고통'에 '공감'하기 힘들어 한다. 

남성이 여성을 보는 것은 '본능'이라거나, 여성들도 '시선을 즐기지 않냐'는 '이의 제기(?)'에 대해 페미니스트 은하선이나, 여성 철학자는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바로 '남성의 권력'이 우리 사회에서 우위에 있기에, 여성들은 그런 '젠더'의 '을'로, 남성들이 끈질기게 자신의 몸을 '관음'하는 시선에 '시선 강간'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폭력성'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 5회 '시선' 문제의 딜레마가, 동시에 젠더 문제의 딜레마가 등장한다. '시선 폭력'의 문제가 제기되고, 그것이 '성적 권력 관계'에서 오는 관음적 폭력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그 '결론'에 대한 공감 대신, 오히려 애초에 개념인 '시선'에 대한 정의와 혼돈으로 '토크'는 뒤돌아 간다. 즉, 과연 어떤 시선이 '폭력'인가에 대해, 상황 설정까지 해가며 다시 설명을 하며, '여자는 안다'라는 단호한, 하지만 모호한 결론에 이르른다. 

'시선 폭력'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 내에서 젠더 권력 관계의 약자인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분명한 '폭력'적 요소임에도, 어디까지가 '폭력'인가에 대해 '당하는 사람은 안다'라는 이 모호한 결론은 바로 현재 우리 사회가 부딪치고있는 '젠더'문제의 모호함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기울어진 젠더의 전문성 
결론에 이르러 봉만대 감독이 '지켜본다'와 '바라본다'라는 언어적 유희를 통해 설명하려 했듯이,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본다'는 성적 호기심, 호감, 그리고 '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를 담은 행위이다. 이는 즉, 프로그램의 초반, '시선'의 문제를 들어 '권력'이라고 소리를 높였듯, 우리 사회 내 '젠더'에 관한 문제는 수 천년의 시간 동안 '가부장제'적 구조 아래 '절대 우위'를 누려온 '남성'의 권력과 그 '권력'의 피해자 여성이라는 문제 임과 동시에, '섹슈얼'한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문제라는 복합적 구도를 지닌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가진다. 

정영진이나 봉만대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후 대표적인 '한남' 심지어 '한남충'으로 인터넷 공간에서 몰매를 맞는 것과 달리,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남성들이 심지어 '여성편'이라며 한없이 고개를 조아리는 서민조차도 '감사하다'는 표현을 들이밀 정도로 '시선'의 문제를 내세우면 그것이 '본능'이라 생각한다는 지점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시선의 폭력'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선'에 대한 정의에 대한 공감대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감'에는 '권력'의 문제와 함께, '생물학적 본능'의 지점이 내포되어 있는 복합적 문제라는 것을 여성과 남성이 역시나 공감하는데서, 우리 사회의 '양성 평등'은 '도그마'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양성 공감'으로서의 지평을 넓혀가지 않을까 싶다. 이는 곧 <까칠 남녀>가 페미니스트적 담론을 되풀이하는 장이 아니라, 진정한 '양성의 대중적 공감'을 확산시키기 마당이 되는가의 시금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패널의 구성 자체에서도 어쩌면 기울어진 세상을 바로 잡겠다고 하지만, 어쩌면 패널의 구성 자체가 기울어진 것이 아닌가 아쉽다.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페미니스트 은하선에 여성 철학자 이현재라는 '페미니즘'의 전문가 두 사람이 포진한 여성의 입장과 달리, 과연 봉만대나 정영진이 '남성'의 대표성을 띤 전문가인가라는 점에서 아쉽다. 즉 여성들의 입장이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적이고, 보다 체계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진 전문가들에 의해 '권력' 문제까지 짚어져 가면서 문제 제기가 되고 결론을 '목적의식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과 달리, '서구에서는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 여성이 자신을 스스로 가리는' 경우는 없다'며 여성들이 좀 더 당당하기를 요구하는 '합리적'인 주장과, 아내가 나를 사랑해서 가사를 돌보고 양말을 신겨준다는 비이성적 잣대를 갈짓자로 오가는 정영진의 주장이나, 에로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뜬금없이 드러내고야 마는 봉만대의 입장은 어쩐지 늘 역부족이다. 하지만 과연 이들을 '한남'이라 욕하거나 제압하고 보면, 우리 사회 남자들이 반성할까? 의식이 달라질까? 과연 이 '한남'이라고 욕먹는 이들이 우리 사회 평균 남성들의 이하인가? 



문제는 이런 이들의 개별적이고 경험주의적이며, '논리적이지' 않은 입장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여성 측 전문가들의 입장이 '격파'한 것이 과연 '양성 평등'의 확산에 도움이 될까? 즉 이는 우리 사회 속 '페미니스트'적인 입장들은 분명하지만 과연 그 대중적 파급력이 얼마나 원심력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실 그런 점에서 기생충 학자 서민의 존재가 아쉽다. 콘돔의 사용과 관련하여 질외 사정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봉만대에게 그건 질외 사정의 합리성이 아니라, 봉만대의 나이에서 오는 정자 운동성의 감소라 과학적으로 짚었던 서민은 5회에 이르러 '여성편'이라며 앙탈을 부리거나, 우스꽝스런 상황극에 자신을 소모한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심화되어가는 젠더 문제와, 경험주의적 무지가 지배적인 공감을 얻고 있는 상황에서, '과학자'로서 서민은 '권력' 관계를 넘어, 보다 과학적인 전문가로서 '방향'을 열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물론, 최근 유행하고 있는 '진화 심리학'조차 '젠더적 편견'에 대해 문제 제기를 받는 상황이지만, 여전히 과학자로서의 그의 사리밝은 식견이 도그만에 빠진 담론과, 그를 맞서는 막무가내 경험주의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젠더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계몽주의적 캠페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그 캠페인의 성공의 전제가 되는 것은 '여성은 물론, 남성 대중의 공감이다. 권력의 관계이지만, 동시에 남성과 여성은 '성적'으로 동반자적 관계에 있는 미묘한 역학 관계의 존재들에 대한 때론 논리적이고, 때론 감성적인 설득이다. 과연 5회를 맞이한 <까칠 남녀>가 이런 딜레마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분명한 지향'과 함께, 그 '지향'을 위한 공감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고민이 제고되기를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7. 4. 25. 16:53